시속 십 마일 풍경
어릴 때 친척들 방문을 할 때면 기차를 탔다. 방학이 시작하면 한가득 짐을 넣은 가방과 함께 다섯 시간이 넘게 기차를 탔다. 자기부상열차 열차로 비행기만큼 빠르게 가고 싶은 곳에 간다는 그림과학 책 속의 미래 아이들을 부러워하면서. 그래도 요즘 기준으로는 느린 듯한 기차 여행은 낭만이 있었달까. 가족들과 끝말 잇기도 하고, 책도 보고... 당시에는 기차에서만 팔던 바나나 우유를 사 먹는 것도 재미였다. "대전역에서 이 분간 정차합니다"하는 차장 아저씨의 안내 방송이 나오면 아버지는 문 쪽에 가셔서 준비를 하신다. 그 짧은 시간 우동을 사 오셔서 함께 나눠먹기 위해서다. 기차 안에서 기다리는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아버지가 못 오시면, 그래서 기차를 못 타시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.
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차창 밖으로 지나가던 농촌의 풍경이다. 쌀이 쌀나무에서 난다고 아는 학생이 있다 하면 비웃던 나였지만,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나도 거기서 별로 다를 바 없었다. 비록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논과 산의 풍경이었지만, 그 자연의 모습들은 기차를 탈 때만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의 보약이었다. 이젠 고속열차가 있어 그런 낭만도 없다. 모든 풍경은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지나가 제대로 보이는 건 먼 산 뿐이다. 바쁘다 보니 목적지에 빠르게 가는 게 좋을 뿐이다.
미국에서 기차여행을 하시는 분들의 블로그를 보면 기차삯이 참 비싸다고 한다. 한국에서는 교통비가 비행기-기차-버스 순인데 미국은 기차가 더 비싸다는 것이다. 아마도 그건 수 킬로미터 상공을 시속 천 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가면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사는 값인 것 같다. 그리고, 그 풍경을 음미하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값일 수도 있다.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이 목적지까지 무작정 내달리는 여행이 아니라 그 과정을 즐기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값이 포함되었는지도 모르겠다.
지난 주말부터 차에 문제가 생겼다. 꼬박 사흘을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는데 썼다. 요즘 차들은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더 큰 문제가 안 되도록 차에 장착된 컴퓨터가 속도를 제한한다고 한다. 덕분에 시속 십 마일(십육킬로미터)로 동네 풍경을 볼 기회가 생겼다. 은행, 음식, 커피, 심지어 교회까지 드라이브-스루로 해결하는 미국에서, 특히 대중교통이 별로인 소도시에선 걸어다닐 기회가 거의 없었다. 삼십 마일, 때로는 오십 마일의 속도로 목적지에 달려가 차에 탄 채로 볼 일을 보고 다시 휙 집으로 돌아올 뿐이다.
비상등을 켜고 십 마일 속도로 달리는 차가 지나가자, 거의 같은 속도로 조깅하는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. 그 시선이 좀 쑥스런 나는 썬글라스로 눈을 가린다. 대신 나도 동네 풍경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. 차들이 알아서 비켜가니 오히려 여유가 있다. 그 길을 달려가거나 혹은 걸어가던 사람들만 볼 수 있던 모습들, 차로 바쁘게 달려갈 때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. 한국에 있을 때 버스만 타고 다니던 길을 걸어가면서 느꼈던 발견의 즐거움(?)이 있었다. 고장난 차 덕에 시간을 많이 손해봤지만 대신 풍경을 얻었다.